과테말라 이야기

주한과테말라대사관

과테말라외무부

주과테말라한국대사관

Leica gallery

 

 

 

    과테말라 이야기를 쓰게된 이유

 

    올(2003) 4월 이사후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그런데 이사후 며칠 후부터 과테말라대사관을 찾는 전화로 시달리게 되었다. 단순히 대사관 위치를 묻는 것에서부터 비자문제서부터, 사업문제, 여행문제까지 다양한 문의전화가 날라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중에야 인터넷검색을 통해 예전 과테말라대사관의 전화번호가 지금의 나의 번호와 같음을 알게 되었다. 참다 못해 과테말라대사관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대사관에 있던 한국인 직원이 그런 일이 생겨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후 궁금한 마음에 시내 나가는 길에 대사관을 한번 들려 보았다. 롯데호텔 6층의 객실 하나를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화려하고 크지는 않았지만 소박하고 내실있는 듯한 대사관이 나의 마음에 들었다. 국민들은 가난하고 못사는데 단지 허세를 위한 멋진 공관을 갖기보다는 비록 적은 경비를 들여 작은 대사관을 운영할지언정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란 인상을 받았다. 주한과테말라대사관 공식홈페이지가 개설될 때까지 비록 부실하지만 당분간 이 페이지들이 그 역할을 대신 하게 될 지 모른다. 아울러 내게 걸려오던 과테말라대사관을 찾는 전화들도 멈추어지길 기대한다. 과테말라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과거 그리고 현재와 같이 영광과 오욕이 되범벅 되어있다. 나로서는 어쩌면 우리의 역사의 부분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갖는지도 모르겠다.

 

* 최근에 나는 과테말라에 거주하는 한 교포로부터 온 메일로 인해 과테말라대사관이 롯데호텔에 위치한 이유를 알게되었다. 그분에 의하면 국내에서는 집시법에 의거 외교사절이 있는 건물의 몇미터 반경 이내에서는 집회허가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가난하고 부패한 국가대사관은 거의 유명호텔에 공짜로 유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롯데호텔과 과테말라 정부와의 공생관계라고 해야 하나? 좀 웃음도 나고 씁쓸하기도 하지만 사실이 분명하기에 여기 추가해 올린다. 2006. 3. 5.

 

 

 

   과테말라 이야기 : 눈부시게 찬란했던 마야문명의 후손들 그리고 오욕의 역사

 

  

 

 

   영원한 봄의 나라 그리고 찬란했던 마야문명

 

   과테말라는 멕시코의 유카탄반도 남쪽의 면적 약 11만 평방Km, 인구 1천3백만의 국가이다. 과테말라의 북동부와 유카탄반도는마야족의 문명 중심지였다. 특히 페텐호수 북쪽 지방은 300∼900년에 이들 마야족에 의해서 체계적인 신성문자(神聖文字), 정밀한 태양력, 영(0)을 포함한 20진법, 세련된 조각, 회화 등 고도의 문명이 발달되고 있었다. 이 문명은 10세기경부터 얼마간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6세기초 스페인에게 점령 당하기 전에도, 과테말라의 마야인들은 고대사회에서 가장 진보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도시 안에는 피라미드와 사원, 공공도서관 등이 있었고, 마야문명의 과학자들은 오늘날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사용하는 것 보다도 더 정확한 캘린더를 사용하기도 했다.  

 

    과테말라의 지형은 태평양 연안에 동서 방향으로 발달한 좁은 해안평야, 북부의 페텐호수를 중심으로 한 넓은 저습지, 시에라마드레산맥의 중앙고원, 카리브 해안평야의 4개지역으로 대별된다. 중앙을 통과하는 시에라마드레산맥은 멕시코와의 접경지역에서는 해발고도 3,500m이고, 동쪽으로는 고도가 낮아져 온두라스와의 국경에서는 2,000m가 된다. 이 곳에는 활화산이 많으며, 서부의 타주물코 화산(4,220m)이 최고봉이다. 산지에는 화산폭발시에 함몰된 곳에 형성된 아티틀란호, 아마티틀란호, 칼데라호인 아야르사호 등 아름다운 호수들이 있다. 시에라마드레산맥에 이어지는 중앙고원은 북동∼남서 방향의 단층과 하곡평야로 깎여져 있으나, 두꺼운 화산재로 덮여 있어 비옥한 농업지대를 형성한다. 특히 산기슭에서는 이 나라의 주요 산업인 커피 재배가 활발하다.

 

    과테말라는 "영원한 봄의 나라"라고 불리운다. 화씨 75도의 기온과 풍부한 강우량, 다양한 야채와 많은 곡물 수확량 등이 이러한 이름을 만들어 내었고, 전체 인구 중 1천 3백만 정도의 인구가 이런 온화한 기후지역에서 살고 있다. 과테말라의 기후는 고온다습한 열대기후로 태평양안의 저지는 연강수량이 2,000mm에 이르나, 우기와 건기가 뚜렷한 사바나 기후를 이룬다. 중앙고원은 우기와 건기로 구분되나, 우량은 고도차에 따라 다르며, 수도인 과테말라시에서는 연강수량 1,316mm, 케살테낭고에서는 670mm 내외이다. 기온은 15∼20℃로 열대기후를 이루는 이 나라에서는 주요한 생활무대를 이루고 있다. 한편 카리브 해안저지는 곳에 따라서는 연간 5,000mm의 강우량을 보이는 고온다습한 곳으로, 열대수림이 무성하다. 페텐평원은 2∼3개월의 건기가 있으나, 역시 고온다습한 열대우림 기후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활엽수림이 널리 분포하는 한편 생물의 종류도 풍부하다.

 

    마야 문명과 인디오의 나라로 불리는 과테말라는 국토의 3분의 2가 산악지대이며 4,211m의 타후물코산을 중심으로 많은 활화산이 산재해 있다. 마야 문명을 중심으로 번영했었지만 마야문명의 의문속의 멸망후 1524년 스페인에 정복되어 3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1821년 독립,1938년 연방 해체로 과테말라 공화국이 되었다. 과거 독재와 쿠테타가 반복되어 정치가 불안정했었다. 전체 인구의 54%가 23개 인디안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메스티조 및 라틴계가 40%, 기타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수의 스페인계 후손인 백인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상류층으로 정치, 경제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다. 원주민은 농업이나 노동자로 종사하고 있어 경제적으로는 매우 빈곤하다. 메스티조는 대개 상인,공무원,정치가로 활동중이고 스페인식 전통을 추구하고 있다. 스페인어가 공용어이나 23개 부족들은 각기 고유한 원주민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오늘날 토착어를 사용하는 인디언들은 매우 드물다. 종교는 70% 이상이 카톨릭어를 사용하고 개신교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과테말라의 원주민 문화는 그들의 복식을 통해 잘 나타난다. 그들이 입고 다니는 화려하게 수놓은 전통복장은 색깔이나 문양 혹은 장신구 하나 하나에 종교적 의미나 부족을 상징하는 표식이 담겨 있다. 서구화가 되면서 전통복장이 사라지는 현상이 일반적인 추세이나 과테말라의 몇몇 지역에서는 관광업의 발전과 더불어 오히려 많은 원주민들이 그들의 전통복장을 즐겨입는 기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The outskirts of guatemala city 1978(Salgado)

 

 

    오욕의 역사 그리고 잔인한 36년간의 내전

 

   과테말라의 역사는 찬란했던 마야문명에서부터 시작하여 이후 16세기초 에스파니아의 식민지가 된 이후 오랜 기간동안의 독재정치와 구데타 그리고 내전 등 영광과 오욕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과테말라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외부침입이 없는 상태에서의 문명의 오랜 번성후에 마야문명은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속에 멸망하였다. 쇠퇴한 문명은 1524년에 멕시코의 정복자 코르테스의 부장인 알바라도에 의해 정복당했고, 과테말라 전역은 그 후 300년간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있었다. 1543년 과테말라 총독령이 설치된 이래 중앙 아메리카의 행정, 사법, 교구(敎區)의 중심이 되었다. 1820년 에스파냐 본국에서의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난 후 과테말라인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은 에스파냐 본국의 급진주의에 불만을 품게 되어 델 바리에를 중심으로 독립 온건파가 결성되었고 1821년 9월에는 멕시코 독립에 자극을 받아 과테말라 총독령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1839년에는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은 스페인계인 크레올인들에게 새로운 번영을 안겨주었지만 마야 후손들에게는 더욱 심각한 상황만을 남겨놓았다. 스페인왕의 몇 안 되는 자유로운 보호정책마저 버려지게 된 뒤, 거대한 마야인들의 토지가 강제로 빼앗겨져 담배나 사탕수수 농장으로 바뀌어졌으며 마야인들은 이 농장에서 더욱 노예처럼 일해야 했다. 이후 오랜 시간동안 독재정치가 자행되었고 다수의 절대빈곤층에 대한 소수 권력층의 폭정과 착취가 끊임없이 자행되었다. 그러다 1931년부터 1944년까지 집권한 독재자 호르헤 우비꼬(Jorge Ubico)에 이어 1944년 당선된 아레발로(Juna Jose Arevalo)대통령은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노동기본법 및 사회보장제도를 신설하는 등 진보주의적 정책을 수행하였다. 이어 1950년 집권한 구즈만(Jacobo Arbenz Guzman) 대통령은 대지주 및 미국회사가 소유한 농지를 소작민들에게 나눠주는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구즈만 정권을 공산주의 정권으로 규정하고 1954년 6월18일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 중령을 내세워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1944년 혁명 이후 민주주의 체제가 잡혀가자 미국은 분노하였다. 결국 CIA는 군사쿠테타를 일으키고, 과테말라는 도살장이 되었다. 이라크, 이란, 베트남, 파나마, 모두 마찬가지였다. 우리 한국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1945년 미군이 한국에 진주했을 때도 미국은, 일본에 항거했던 반파시스트들로 조직되었으며 국민들에 기반을 두고 있던 한국 정부를 해체시켰고 일본 파시스트 경찰과 일제 시대때 그들에 협력했던 일부 한국인들을 이용하여 국민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억압했다. 작은 섬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농민들의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살해당한 3만~4만명을 포함하여 약 10만명이 이미 한국전쟁 이전에 남한에서 목숨을 잃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꼭두각시 국가이다. 그들의 부를 위해 민주주의적 자립형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절대 원치 않았다. 군부 내지는 독재정권이 국민들을 억누르고 특권층의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한 상태에서 권력자들과 손을 잡고 모종의 거래를 지속하는 것이다. 부패한 독재자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이지 국가전체나 가난한 민중의 행복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거래도 모든 선택은 미국에 달려있다. 아무리 그들이 지지하던 독재정권이라도 미국은 그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벗어나 미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반하려는 순간부터 적으로 잔인하게 몰아세운다. 그것은 그들의 국익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작은 나라조차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더 잔인하게 짓밟았다. 이것은 그 유명한 썩은 사과의 논리로 설명된다. 사과상자 속의 사과 하나가 썩으면 전체의 상자가 썩어 버리듯, 작은 나라의 민주화가 썩은 사과의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그 작은 나라들의 민주화를 그토록 증오했고 결국 박살내었던 것이다. '노암 촘스키'의 말을 빌리자.

 

   "니카라과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다고 해도 미국기업계내에서는 그 사실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엘살바도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이 두나라는 수십억달러와 수십만명의 목숨이 소모된 미국의 살인적인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약하고 가난한 나라일 수록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스러운 것이다. 만약 그라나다처럼 아주 작고 가난한 나라가 국민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할 수 있게 되면, 그라나다보다 자원이 풍부한 다른 나라들이 "그렇다면 우리라고 못하란 법이 없지 않은가?"라고 자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1996년 12월 말 과테말라 정부와 반군단체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이전까지 군부를 중심으로 한 우익과 좌익게릴라 사이에 충돌이 지속되었다. 이것이 바로 과테말라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과테말라내전이다. 지주세력을 중심으로 한 군부우익세력과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촌 및 산악지역의 원주민과 농민들을 대표하는 좌익게릴라 세력이 서로 충돌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 진영 어느곳도 과테말라 대다수 극빈 민중의 상황개선에 정책적 중점을 두지 않았다. 과테말라 내전의 원인은 사회전반의 빈부 격차와 이를 기초로 심화된 이데올로기적 갈등에 기초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냉전시기 미소대립의 상황과 미국의 자국 이익을 위한 군부독재정권 지원이 숨어있다.

  

   오랜 내전후, 1994년 1월10일 정부와 URNG간 평화협상이 재개되어 3월 인권관련 합의 및 6월 난민귀향 합의, 1995년 3월에는 원주민의 주체성과 권리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 1996년 1월 새로 집권한 아르수(Alvaro Arzu) 대통령의 평화협의 우선정책에 힘입어 3월 상호 공격 중지를 합의하였고 그해 12월 29일 마침내 영구평화정착에 합의함으로써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36년간의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1997년 5월, UN 군사참관단의 입회하에 URNG의 무장해제가 완료됨에 따라 과테말라 정부도 총 군전력의 33%를 감축하였다. 따라서 1962년부터 1990년까지 총 10만명의 사망자와 5만명의 실종자, 2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내전이 끝나게 되었다(UN위원회는 20만명 이상이 내전기간중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9년 1월,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은 11월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공천하기 위해 정당을 설립하고 등록하였다. 99년 초에 공개된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은 과테말라 정부가 수천명의 시민을 사살하는 가운데서도 정부군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등 협조관계를 유지해왔다고 한다. 학살사건이 발생하던 당시 미국정부는 이를 알고 있었지만 협력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엘살바도르에서 보았듯이 미국은 그 잔인함에 있어서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의 살육대들을 양성하고 지원하였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 지역 방문에서 미국이 군부독재자들을 지원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고 사과하였다. 그러나 과테말라 정부는 군부의 학살을 조사하고 주모자들을 처벌할 특별위원회를 구성할 뜻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the Guatemala National Revolutionary Union, Unidad Revolucionaria Nacional de Guatemala: URNG): 1982년 쿠바의 지원으로 반정부 게릴라 단체를 통합하여 외국자본을 배격하고 애국적, 혁명적, 인민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4개의 반군단체(the Revolutionary Organization of the People in Arms(ORPA), the Guerrilla Army of the Poor(EGP), Rebel Armed Forces(FAR), Guatemala Labor Party(PGT))가 연합하여 약 1,500명(혹은 6,000명) 규모로 창설되었다. 남미, 캐나다, 미국 및 유럽의 여러 조직들과도 연계하였다.

  

 

   변화의 바람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 그러나 ...

 

    1999년 12월 26일 실시된 대선 결선투표에서 제1야당인 과테말라공화전선(GRF)의 알폰소 포르티요(48세) 후보가 집권 국민진보당(PAN) 후보 오스카르 베르헤르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포르티요는 과테말라가 40년만에 자유선거를 통해 뽑은 대통령으로 2000년 1월 14일 4년 임기의 대통령에 공식 취임하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일자리 창출, 범죄추방, 농촌개발 등을 공약으로 내건 포르티요가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포르티요가 과테말라의 독재자로 악명 높았던 리오스 몬트 장군의 후계자란 점을 들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과테말라 인권운동가 리고베르타 멘추는 "과테말라가 과거의 독재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포르티요는 "96년 평화협정이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포르티요 대통령 당선자는 대학교수 출신이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극우정치가이다. 쉰 듯한 목소리에 대중을 휘어잡는 힘이 숨어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그는 또 살인자에서 대통령이 된 이색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지난 9월의 선거운동 기간 중 82년 멕시코에서 2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적이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고 공소시효 역시 지난 상태여서 더 이상의 논란은 없었다. 많은 비난에 대해 그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과테말라 국민을 지킬 수 있다"는 선거구호로 활용하였다.

 

    과테말라의 정체는 입헌공화제로 1966년 5월에 신헌법이 발효되어, 형식적으로는 공화제 대의제로 복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헌법은 정치 형태를 공화제로 규정하여 국민투표에 의해서 선출되는 임기 4년의 대통령에게 집행권을, 직접 국민투표에 의해서 선출되는 55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되는 단원제 의회에게 입법권을 부여하고 있다. 투표권은 18세 이상의 남녀에게 부여되어 있다. 정당으로는 과테말라공화전선(GRF), 국가진보당(PAN), 국가중도연합당(UCN), 국민해방운동(MLN), 기록민주당(PDCG), 사회민주당(PSD) 등이 있다. 공산주의 정당인 ‘과테말라 노동자당(PGT)’은 1954년 이래 비합법적 상태에 놓여왔으나, 노동자 및 지식계급층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다. 현 정권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걸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재건을 목표로 삼고 있으나, 완전한 민주주의를 갈구해서 싸우는 게릴라 부대의 강화에서 나타나는 혁명운동의 앙양과 반혁명적인 우익군부와의 사이에 끼여 있어, 그 앞날이 밝다고는 결코 볼 수 없다. 안정과 번영을 위한 가장 커다란 관건은 과테말라 사회가 안고 있는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권력구조의 불평등을 얼마나 해소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러나 비록 그간 숱한 내외환에 시달렸고 영토는 작을지라도 풍부한 자연자원과 낙천적인 국민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찬란했던 문명을 이루었던 마야인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후손들에게 그간의 어둠에서의 탈출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다. 영원한 봄의 나라 과테말라에서 마야의 기적이 언제 다시 꽃피울지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마야의 후손들 그들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있고 그들만이 그 시기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www.leica-gallery.org -

 

 

 

 

Welcome to www.leica-gallery.org

 

This is for my family  and  my friend, Patrick L. Groleau. But I welcome everyone to my homepage.

 

 By  Hwayong, Kim     khy906@yahoo.co.kr

Since 11. 2001.

Page View /